84년 12월 31일 84년 마지막 일기
방금전..
재야의 종소리가 울렸다.
장엄하고도.. 힘차게..
그러나 아직은 84년이고 싶다
내일 아침 동편의 해가 찬란히 떠오를 때까지는
나의 84년으로 잡아두고 싶다.
아~ 왜 이리 가슴은
미어지듯..쓰러지듯..공허할 수가 있을까?
이 밤을 꼬박 새우고 싶다.
내가 첫발을 디딘 순간부터
이렇게 멈추어
이제껏 온 발자취를 돌아보는 지금까지를..
하나 남김없이 나는 생각하리..
많이 울었엇지..
누가 내게 울보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었나..
그래서 난 눈동자 가득 고인 눈물을 어쩌지 못하고
울어버리곤 했나 보다.
별이 보고싶다. 내 영원한 벗인 별을.. 나를 슬프도록 사랑하는 별을 보고싶다. 그러나 나의 창은 옛 여인들의 기다란 치마자락모양 커튼이 치렁하게 드리워져 있다. 그래서 난 내 심장 가장 한 복판에다 나의 별을 아로새긴다.
언제인가 내 맘속에 자리한 나의 별들을 헤아려 보니.. 제법 된 듯하다. 꼭 하나밖에 몰랐던 이기적이던 아이가 이제야 뭔가에 눈을 뜬 듯 하다.
하늘아.. 너의 품으로 축복하여다오. 나의 별을 머금고 있는 하늘아.. 이 아픈 작은 나까지 그 품에 안기게 하여다오..
나는 행복이 두렵다. 이 가슴이 충만할 때..난 슬퍼진다. 그건 순간의 행복이 지나버린 뒤의 그 공허를 달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강한 아이라고 자부해왔지만 실은 너무도 나약한 아이였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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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사랑하리..나의 한 해여..
나 사랑을 배웠다.
네게서 사랑을 느꼈다.
오가는 사람들의 한마디 눈빛 속에서 정을 느꼈다.
침묵과 무관심한 듯한 정..냉정한 우정..친구..
무엇보다도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사랑을 배운 한 해였다.
많이 이해하려 했고 사랑하려 했다.
아주 약간이지만 허무하지 않아 이 가슴은 충만하다.
꼭 한가지..언제나 소중히 상상하곤 하던 소망
아주 하찮은 것인지 몰라도 ..
정말정말 단 하나의 소박한 소망..
내년에도 이루지 못할 것만 같은 소망..
그러나 언젠가는 꼭 이루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봄이면 연한 초록이 움터나는 부드러운 언덕.. 그곳엔 이름모를 들꽃이 옹기종기 모여 속살거리고 나비들은.. 아주 예쁜 나비들은.. 화사한 날개로 이 꽃 저 꽃 옮아다니고 나는 하늘에 떠 있는 하얀 구름을 보며 잔디를 베고 누워 가만히 눈을 감고 입가에는 미소를 머금고 풀내나는 언덕에 황혼빛이 물들 때까지 시를 노래하고 .. 나를 사랑하는 나의 벗은 나름대로의 자기세계에 빠져 나의 옆에서 미소하리.. 아~나는 행복하겠네.. 여름이면.. 가을이면.. 겨울이면.. 모두 한아름 묶어 85년 늦가을날 낙엽은 이미 쓰러진 친구들의 퇴색한 몸 위로 뒹굴 때.. 고목아래 벤치가 홀로 외로워 할 때.. 가만히 펼쳐봐야지.. 그 때 나는 또 내 벗과 단 둘이 있겠네.. 나는 행복하겠네..
아~ 84년이 가려한다.
365날이면 꽤 많은 날일텐데..
사연도 많았는데..
할 말이 생각나질 않는다.
그러나 뭔가를 자꾸만 적고 싶다.
이 밤이 새도록 무언가를 남기고 싶다.
85년..고 3.. 대입학력고사..
최선을 다해야지.
그동안 딴 곳에 머물러 있던
내 여린 마음을 강하게 집중시켜
내 인생의 중요한 한 장이 될 이 한 해를 소중히 여기며..
열심히 아주 열심히..
후회없이 공부에만 전념해야겠다.
내 인생이기에..
동시에 가여우신 엄마 아빠의 희망이기에..
그리고 사랑하는 동생들이 커가고 있기에..
난 이겨야한다.
우선 나 자신을 이길 수 있어야겠지.
84년의 방황을 후회하지 않도록
85년은 지독한 열심으로 보내야지.
나의 84년..안녕..
다시 못올 우리의 마지막 밤을
너와나 둘이서 지새우자.
안녕.. 84년아..
잘가..
안녕.. 안녕.. 안녕..
- 열 일곱 벗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