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아버지..
나의 외할아버지..
너무나 안타깝도록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젊은 날 내 정신적 지주이셨고..나의 영원한 우상이셨던..외할아버지
어린날..
외가댁 빛바랜 사진첩 속에서 학생복 차림의 그 모습을 뵌 순간부터..
나의 사모의 정은 깊어만 갔었다.
내가 가는 곳 어디에나..내 방 가장 소중한 곳에서 언제나 나를 지켜봐 주시던
젊어 너무나 안타까운 나의 외할아버지..
햇살 반짝이는 마루에 누워 나의 귀지를 파주시며 엄마는
옛날을..
한스런 엄마의 삶을..
조각조각 읊어 주시곤 했다.
너무 오랜 얘기라..
그때는 그저 흘려 들은 얘기라..
온전하게 기억하진 못하지만
울엄마의 고향은 일본이다.
일본 이름이 무스꼬라 했다.
한 가문의 종손이셨고, 참 잘나고 영민하셨다는 외할아버지는
해방이 되자..해방된 내 조국에서 살고 싶으시다며
외할머니의 극구반대에도 불구하고 안정된 그곳 생활을 버리시고
한달음에 고국으로 돌아오셨다고 한다.
엄마는..눈만 감으면..눈앞에 어떤 빛의 영상이 어른어른거리는데..
아마도 일본에서 돌아오는 배안에서 흔들리던 등잔빛인거 같다고 유추하셨다.
그 흔들리는 빛이..엄마의 평생을 어른거렸노라고..
감격에 겨워 되밟은 조국땅에 전쟁이 터지고..
뒷산에 숨어있던 빨갱이들이 잡혀가는 것도 간혹..기억에 남는다는 엄마..
그 빨갱이들 소탕작전 와중에..그 와중에.. 바로 뒷집 사는 이가 빨갱이였고..
하필..외할아버지와 성은 다르나 이름이 같았던 그 사람으로 오인받아..
급작이 들이닥친 국군에게 한마디 항변도 해명도 못하시고..
뒷산으로 끌려가.. 그렇게..엄마는 그 뒷 얘기는 절대 하지 않으셨다.
얼마나 애통했고 기막혔는지는 끝내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다만..이모님이 가슴을 치시며.. '어떻게 빨갱이도 아니고 국군이..우리 국군이..'
이모님도 차마 뒷말은 잇지 못하셨다.
어린 맘에도 이런 생각을 했었던 거 같다.
총성이 울리고.. 총알이 박히는 아픔과 공포보다도..
어리디 어린 세남매를 두고가야한다는 아픔과 공포가 더 크셨을거라는..
차마..끝내..두 눈을 감지 못하시고..시리도록 서러운 하늘만 응시하셨을 거라는..서러운..
나 살아오는 동안에도 세 남매 손을 잡고 외할아버지 주검 찾아 뒷산을 오르던..
휘이~훠이~휘적이던..외할머니의 새하얀 치맛자락과 눈물젖은 옷고름이 자꾸만 어른거렸다.
그 어린날에도.. 그 때의 외할머니 보다 더 나이든 지금에도..
나는 고향뒷산을 오르던 외할머니의 하얗게 젖은 옷고름만.. 끝끝내 어른거렸다.
-눈물 8.21-
p.s 그러고 보니..내 눈이 외할아버지의 눈을 꼭 닮은 듯 하다..
외할아버지께서도 웃으실 때..눈부터 웃으셨을까..나처럼..?
외할아버지의 눈빛도 언제나 촉촉하니 젖은 듯한 슬픈 눈이셨을까..?
웃지 않으면 슬퍼보이는 ..
남자 여럿 잡을 눈이라고 ..어려서부터 그런 소릴 듣곤 했는데..
나의 외할아버지께서 나에게 물려준 아름다운 유산 ..
정말 그립습니다.
나 죽기 전 타임머신이 생겨나길..
꼭 한 번 .. 그 어린날의 나를 보고 싶습니다.
젊은 날의 내 어머니와 아버지..
가능하다면..나 태어나기 전 돌아가신 외할아버님도..
사진 속의 젊으신 그 모습..
살아계신듯 뵈올 수 있다면..
왜 그리 급히 가셔서 울 엄마 고생시켰냐며..
당신의 자손이 이리 어여쁘게 살고 있노라
뵈어 드리고도 싶습니다..
대학시절 내내 할아버지 사진 품고 있었노라..
그렇게 이 외손녀가 할아버님을 사모했노라..
고백도 하고싶습니다..
지금 저, 울고 있습니다.
외할아버님의 너무나 짧은세월과
울 엄마의 한스런 세월이 안타까와
하염없이..
- 벗 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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