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늙으면 당신과 살아보고 싶어
가능하다면 꽃밭이 있고
가까운 거리에 숲이 있으면 좋겠어
개울물 소리 졸졸거리면 더 좋을 거야
잠 없는 나 당신 간지럽혀 깨워
아직 안개 걷히지 않은 아침 길
풀섶에 달린 이슬 담을 병 들고 산책해야지
삐걱거리는 허리 주욱 펴 보이며
내가 당신 “하나 두울~”
체조시킬 거야
햇살이 조금 퍼지기 시작하겠지
우리의 가는 머리카락이 은빛으로 반짝일 때
나는 당신의 이마에 오래 입맞춤하고 싶어
사람들이 봐도 하나도 부끄럽지 않아
아주 부드러운 죽으로
우리의 아침식사를 준비할 거야
이를테면
입맞춤 하고싶어
파릇한 야채 띄워 야채죽으로 하지
깔깔한 입안이 솜사탕 문 듯 할 거야
이 때 나직히 모짜르트를 울려 놓아야지
아주 연한 헤이즐럿을 내리고
꽃무늬 박힌
찻잔 두 개에 가득 담아
이제 잉크냄새 나는 신문을 볼 거야
코에 걸린 안경 너머 당신의 눈빛을 읽겠지
눈을 감고 다가가야지
서툴지 않게 당신 코와 맞닿을 수 있어
강아지처럼 부벼 볼 거야
그래 보고 싶었거든
해가 높이 오르고
창 깊숙이 들던 햇빛 물러설 즈음
당신의 무릎을 베고
오래오래 낮잠도 자야지
아이처럼 자장가도 부탁해 볼까 ?
어쩌면 그 때는
창 밖의 많은 것들
세상의 분주한 것들
우리를 닮아 아주 조용하고
아주 평화로울 거야
나 늙으면 당신과 살아보고 싶어.
작은 토담집에 삽살개도 키우고
암탉에 노란 병아리도 키우고
조그만 움막 하나 지어서 뿔 달린 하얀 염소 키우며
나 그렇게 한번쯤 살아보고 싶어.
울타리 밑에는 봉숭아, 맨드라미,나팔꽃, 분꽃을 심고
집 옆 작은 텃밭에는 가지, 오이, 고추, 열무,상추를 심어서
아침이면 싱그러운 야채로 음식을 만들고 싶어.
봄엔 파릇파릇 쑥국을 끓여 먹고
여름엔 은빛머리에 잘 어울리는 풀 먹인 하얀 모시옷을 입고
가을이면 빨간 꽃잎, 초록 댓잎 넣어 창호지를 바르고 싶어.
겨울이 오면 잠 없는 밤
눈 오는 긴긴 밤을 당신과 얼굴 마주하며
다정한 옛이야기로 온 밤을 지새우고 싶어.
나 늙으면 긴머리 빗질해서 은비녀를 꽂고
내 발에 꼭 맞는 하얀 고무신을 신으며
가끔은 의자에 앉아 책을 보다가 서산에 지는 해를 바라보고 싶어.한쪽 지붕에는 노란 호박꽃을 피우고
또 한쪽 지붕에는 하얀 박꽃을 피우며
낮에는 찻잔에 푸른 산을 들여놓고
밤이면 달, 별, 이슬 한 줌 담아 마시면서
남은 여생을 당신과 행복하게 살아보고 싶어.
* 봄엔
당신 연베이지빛 점퍼 입고
나 목에 겨자빛 실크스카프 메고
이른 아침 조조영화를 보러 갈까 ?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같은...
* 여름엔
앞산 개울가에 당신 발 담그고
난 우리 어릴 적 소년처럼
물고기 잡고 물장난 해보고
그런 날 보며 당신은 흐릿한 미소로
우리 둘 깊어가는 사랑 확인하려 할 거야
* 가을엔
희끗한 머리 곱게 빗고
헤이즐럿 보온병에 담아들고
낙엽 밟으러 가야지
저 벤치에 앉아 사진 한 번 찍을까?
곱게 판넬하여 창가에 걸어두어야지
* 겨울엔
당신의 마른 가슴 덥힐 스웨터를 뜰 거야
백화점에 가서 잿빛 모자 두 개 사서 하나씩 쓰고
강변 찻집으로 나가 볼 거야
눈이 내릴까...
나 늙으면 당신과 살아보고 싶어
당신의 굽은 등에 기대 울고 싶어
장작불 같던 가슴
그 불씨 사그러들게 하느라 참 힘들었노라
이별이 무서워
사랑한다 말하지 못했노라
사랑하기 너무 벅찬 그 때
나 왜 그렇게 어리석었을까 말할 거야
그리고 그리고 서점엘 가는 거야
책을 한아름 사서 들고 서재로 가는 거야
지난 날 우리 둘 회상도 할 겸..
*시집 <사랑하니까 괜찮아/황정순>
1764
- 벗 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