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억의 시간..장용길作 >
내 어릴적엔 1원짜리 동전이 통용되던 시절이였다.
어느날부터인가 1원짜리는 방바닥 이 구석 저 구석에 팽개쳐진 채 홀대 받고..
그래도 5원짜리 들고 영자언니네 점빵 가면..뽑기나 고무과자 정도는 사먹을 수 있던 시절..
엄마는 가끔 하굣길에 군것질이라도 하라며..용돈으로 10원을 주시곤 했는데..
어쩌다 20원을 주시는 날이면..나는 그걸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어..
괜히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짤랑짤랑~~동전소리를 내곤 했었던 기억이 있다.
그만큼 돈이 귀하고 가난하던 시절이였다는 얘기다.
그 시절..우리마을에도 새마을운동 바람이 불어와..
집집마다 새 집을 짓느라고 동네 앞 공터엔 벽돌이 산처럼 쌓이곤 했었다.
좁은 동네 골목골목 트럭이 들어 갈 수 없으니..그 벽돌을 공사장까지 나르는 일은..
동네사람들의 짭짤한 아르바이트가 되어 주었다.
벽돌을 나르는 날이면..온 동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지게며 고무다라이며 양동이며..
집집마다 벽돌을 담아 나를 수 있는 것을 총동원해서 공터로 출동을 했다.
그렇게 공사장까지 벽돌을 날라다 주면..한 장 당..얼마씩 쳐주었는데..
정확한 액수는 모르겠지만 엄마랑 나랑 그렇게 종일을 나르면..
어린 마음에도 힘들었다는 기억보다 제법 짭짤한 수입에 흐뭇해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봤자..백 몇 십원??정도..
그리고 또 하나 기억나는 건..
내가 기계체조를 하기 전이니까..초등 2~3학년 정도..
누구한테 들었는지 기억엔 없지만..
고물상에 철사나 못..종이를 갖다 주면
무게를 달아서 돈으로 쳐준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다락방에 있던 다 쓴 노트며 일기장.. 교과서..
그리고 동네 공터 쓰레기더미를 뒤져..녹쓴 철사며 못을 주워..
동네 친구랑 낑낑~ 들고서는 제법 머언 거리에 있는 고물상에 가져갔었다.
그날..무게를 달아 후하게 돈을 쳐주시며..
마음 좋게 웃어주시던 고물상아저씨..
그 얼굴은 기억이 바래져 도무지 알 수 없지만
그 선하시던 마음은 아직도 온기로 남아 있다.
그리고 중학교 1학년 시절..
내 인생에 가장 푸르고 아름다웠던 소녀시절..
벗님이랑 친구 몇이서 작당을 해서..
그 해 겨울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 둔 어느 날에..
우리는 손수 성탄카드를 만들었었다.
아마 그걸 팔아서 불우이웃을 돕겠다는 갸륵한 마음이였을 것이다.
참 어설프게 만든 그 카드를 들고 우리는 학성고등학교 앞에서
하교하는 고딩오빠들을 붙잡고..카드 사달라고 ..
참 염치 좋게 쫄랑쫄랑 거리며.. 카드 사달라고..
아직도 기억나는 건..대부분의 오빠들은 웃으며 그냥 지나치는데..
자전거를 끌고가던 인상 좋고 푸근해 보이던 오빠가
카드를 몇 장이나 사주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 오빠의 선한 웃음이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또렷이 기억이 난다.
이것 말고도 더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이 내가 유년에 내 힘으로 돈을 벌었던 기억이다.
< 詩人이 되어..장용길作 >
그리고 대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대학 입학 하자마자 나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봤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우리집이 풍족하진 않으나 엄마아빠께서 나 대학시킬만큼은 되셨는데..
육남매의 맏이라는 그 무게감 때문이였을까..
무엇보다 고생하시는 엄마아빠 생각만 하면 늘 가슴이 시큰거린 것이
어쩌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다행히 같은 자취방에 학교 후생복지과 간부로 있는 축산과 선배가 있어..
그 선배의 빽으로 아무런 서류절차 없이 아르바이트 장학생으로 뽑힐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제 2도서관 구내분식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다.
하루 3시간에 매일 식권이 2장..
한 달 급료도 그 당시 한 학기 등록금의 3분의 1정도로..
꽤 괜찮은 조건이였다.
계란 까고..국수 삶고..우동 끓이고..배식하고..설거지 하고..
그리 힘들다 느끼진 않았었는데..
처음 한 달간은 몸살을 앓고 위경련까지 오고..나름 고생을 했다.
그렇게 한 달..급료를 받으면 바로 학교 안에 있는 은행으로 달려가
고대로 저금을 했었다.
대학 1학년 때..같은 과 같은 학번이던 내남자를 만났다.
중간고사는 하필 개나리 벚꽃이 만개하는 봄날의 정점에 꼬옥 치루는지..
풋사랑에 한창이던 우리 둘은 시험공부는 아랑곳 않고..
농대초원이며 러브로드를 거닐며..
그렇게 봄날의 화사함과 나른함 속에서 헤어날 줄을 모르고..
대학 첫학기 장학금을 놓쳐버린 나는..엄마아빠께 너무나 죄송했다.
그래도 아르바이트 해서 차곡차곡 모아둔 돈을 등록금에 보태라며 엄마께 드렸다.
엄마는 공부하라고 대학 보냈지..아르바이트하라고 대학 보냈냐며..나무라셨지만..
나중에 후일담처럼 동네 아줌마들에게 나를 자랑하시곤 하셨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방학 때면..교통정리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이것도 나라에서 대학생들에게 베풀어주는 혜택의 일종이였다.
하루 1시간씩 방학 두 달 동안
횡단보도에 서서 깃발 들고 신호등색깔에 맞춰..깃발을 올리고 내리고..
여름날은 그래도 견디겠는데..겨울날의 혹한은 참 견디기 힘들었었다.
1시간을 그렇게 제자리에 서 있으면..
나중에 발가락에 감각이 없어지고..온 몸은 꽁꽁~~
선천적으로 내겐 힘든 거에 대한 내성이 있는지..
그땐 당연한 듯이 받아 들였고 그러한 일련의 고생들이 고생이라 여겨지지 않았었다.
그렇게 또 돈이 모이면 나는 고대로 또 엄마께 갖다 드렸다.
같이 아르바이트한 언니들 중엔
그 돈으로 부곡하와이 간다 그러고..이쁜 옷 살거라 그러고..
내가 엄마 갖다 줄거라니깐..착하다고..
내겐 당연한 일인데..언니들은 나더러..착하다고 ..(이거 자랑질?? ㅎ~)
그리고 동네 초등학생들이나 중학생들 그룹과외도 해보고..
뭐.. 대충 그랬었다.
< 향수..장용길作 >
806
그러다 대학 3학년..
그때도 취업난이 만만치 않던 시절..
그래도 법대생이라고 고시니 7급이니..
목표는 높게 잡고 도서관에 박혀 공부하던 시절..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보험용으로 9급 공무원 시험을 쳐두었다.
창피해서 9급 쳤다는 말은 못하고..
행여..대학졸업 후에 취업하지 못하면 9급공무원이라도 할 요량으로..
우수한? 성적으로 무사 통과하고 ..
발령은 대학 졸업 후로 연기신청을 해두고..
내가 우수한 성적이라고 자만처럼 얘기할 수 있는 근거는..
면접 볼때 얼굴이 유난히 하얗고 번지르르한 사무관 둘이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렇게 좋은 성적으로 왜 9급에 지원했냐구??>
그렇게 대학에서의 4년이 꿈결처럼 흘러가고..
부전공으로 교육학을 전공한 덕에 어릴적부터의 소망이던 교단에도 서 보구..
비록 교생선생님이라는 명분이였지만..
그렇게 대학졸업을 미처 하기도 전에 총무처에서 발령통지서가 날아오고..
그렇게 나의 첫 직장생활은 시작 되었고..
나의 아르바이트 생활도 마감을 하게 되었다.
- 벗 님 -
그외는 괘않은데..ㅜㅡ...
순간 접속이 많으면요 ^^;;;;
그리고
요즘..해킹 장난아니라니...이것도 한번해보세요 ^^;;;
http://blog.daum.net/munandcom/17435252 [비밀댓글]
현모양처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랍니다.
각고의 노력과 연마된 내성이 필요한 거죠.
난 이제 현모양처되보려 하니 엄청 힘드요.......ㅎㅎㅎ
효성 지극한 모습에 감동, 감탄.
두 딸도 엄마 아빠 닮아 역시 똑똑하고.....벗님은 좋겠습니다
벗님
미산에 지금 폭설 내리고 있답니다
구경오세요
벗님은 양파 과에 속하셨어요.
정말 까도까도 무궁무진한 재능이 속에 숨어 있다니까요.
저처럼 무능무재한 사람이 볼 때
이 글은 자랑질(?)이 맞습니다.ㅋㅋ
오늘 오랜만에 이 글 보고 한참 웃습니다.
점빵 / 카드 장사 등등 오랜 풍경들도 정겹고요,
아무튼 벗님의 매력이 더욱 돋보입니다.
잼나다요(^^) 꽃이 흐드러지게 피면 그추억이 해마다 찾아오겠지요(?)
별루..착한 딸 아닌데~~
아직두 부모님 걱정만 시키는 못난 딸이거든요.ㅠㅠ
오늘 친정아빠가 입원하셨단 소식 들어서..마니..
울적해요..플로라님..
오늘은 쬐끔 엿보고 내일 다시 들어와 보렵니다
좋은 밤이 되시길...!!
"뫼 닮" 글
하필..진지한 글 올린 날에 오셨어요.
사실 별루 진지하지 않답니다.
그저 소소한 일상이나 끄적이는 곳이랍니다.
방문 감사해요..뫼닮님..^^*
"벗님"의 글을 다시 읽어 봅니다
우선 글속의 내용을 보면서 "벗님"의 연령과 이야기 배경의 시대를 갸늠하느라고..
그런데 위 글로만 추축하긴 무척 힘이 드는군요
어느 대목에선 저와 비슷한 연배..어느 대목에선 저보다 많이 늦은 세대...??
그처럼 우리들의 세대는 다이나믹한 세대로 변화가 많았고..
모든 입장과 환경이 용광로에 녹아 공존하고 있던 세대였지 않은가 싶습니다
저도 중3부터 아르바이트를 하여 제법 아르바이트 재벌[?]쪽에 속해
절은 나이에 부족함이 없이 지낸 경험이 있답니다
그런데 막상 학교를 졸업하고 정식적인 직장에 들어가니
급료가 아르바이트수입의 1/5도 아니되더군요..ㅎㅎㅎ
"벗님"의 옛글을 더 읽어 보렵니다 건강하십시요..!!!
"뫼 닮" 글
오늘에도 있음을 보았습니다
가만, 법대생이라..무서버^^
제가..기계체조했었단 얘길..했었던가요??
제겐 악몽같았던 시절..
어쩌면 그 덕에 제가 쪼매 독해진 건 ..있을지도..ㅎ~
근데..뭐 죄 지으신 거라도..??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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